처음엔 우리도 스펙을 썼습니다
아젠트리움은 14K 주얼리를 만드는 브랜드입니다. 처음 받은 자료에는 캐럿과 도금 방식, 체인 길이, 광택 처리 같은 것들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하츠는 전문가용 미용가위 브랜드입니다. 날의 형태, 피벗 구조, 손잡이 각도, 다섯 가지 라인업.
둘 다 좋은 정보입니다. 구매를 결심한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정보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숏폼에서 그 정보가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세로 화면에서 12초. 그 안에 "스테인리스 특수강"이라는 단어가 지나가면, 보는 사람의 엄지는 이미 다음 영상으로 넘어가 있습니다.
스펙을 넣은 초기 컷들은 만들기도 쉽고 틀린 것도 없었지만, 끝까지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끝까지 보지 않은 영상은 아무것도 설득하지 못합니다.
질문을 바꿨습니다
"이 제품을 어떻게 설명할까"를 "이 제품이 누구의 어떤 순간에 놓여 있을까"로 바꿔 보기로 했습니다. 각본의 출발점을 제품이 아니라 사람의 하루로 옮긴 겁니다.
아젠트리움의 EP31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눈앞에서 버스를 놓친 사람이 있습니다. 다음 차 시간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그냥 앉아 있기로 합니다. 그제야 나뭇잎 소리가 들리고 아침과 다른 하늘빛이 보입니다. 놓친 몇 분이 뜻밖의 내 시간이 됩니다.
이 12초 안에 목걸이는 한 번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냥 그 사람의 목에 있습니다. 카메라가 그것을 특별히 비추지도 않습니다.
제품은 화면 가운데가 아니라, 장면 어딘가에 있어야 합니다.
하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EP07은 첫 고객을 맡는 날의 출근길에서 시작합니다. 살롱에 도착하면 선배가 가위 케이스를 신입 쪽으로 말없이 밀어 줍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가위의 날이 얼마나 정교한지 설명하는 대신, 그 가위가 건네지는 순간을 보여 줍니다. 도구는 누군가의 시작을 돕는 자리에 놓입니다.
한 편으로 끝내지 않기
두 번째로 바꾼 것은 분량이 아니라 형식이었습니다. 잘 만든 브랜드 필름 한 편 대신, 번호가 붙은 에피소드를 계속 올리기로 했습니다. EP01, EP02, EP03.
연재에는 광고에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음 편 입니다. 한 편을 본 사람은 그 브랜드를 '봤다'로 끝내지만, 세 편을 본 사람은 네 번째를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더 이상 광고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를 따라오는 사람입니다.
에피소드가 쌓이면 또 하나가 생깁니다. 브랜드의 성격입니다. 한 편만 보면 "예쁜 영상"이지만, 서른 편을 보면 이 브랜드가 어떤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가 보입니다. 아젠트리움은 혼자 보내는 저녁과 오래 쓰는 물건을 좋아하는 브랜드가 되었고, 하츠는 누군가의 첫날을 응원하는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어느 쪽도 우리가 직접 말한 적은 없습니다.
아젠트리움 EP36, 하츠 EP17. 두 시리즈를 합쳐 50편이 넘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두 시리즈 모두 기획과 각본, AI 영상 생성, 편집과 자막, 채널 운영까지 topsolution.lab이 맡고 있습니다.
AI가 이 방식을 가능하게 한 부분
솔직히 말하면, 예전 방식이었다면 이 선택을 못 했을 겁니다. 12초짜리 이야기 한 편을 찍으려면 장소를 섭외하고 사람을 부르고 하루를 써야 합니다. 그렇게 만든 영상에 제품 설명을 안 넣는 건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AI로 장면을 만들면 그 비용 구조가 바뀝니다. 바다로 가는 날, 버스 정류장의 저녁, 결혼식장 앞 복도를 각각 따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편을 아껴 쓸 필요가 없어집니다. 아껴 쓰지 않아도 되니까, 한 편에 모든 메시지를 욱여넣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의 영상에는 하나의 감정만 담고, 나머지는 다음 편으로 미루면 됩니다.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AI의 진짜 쓸모입니다. 더 빨리 만드는 것보다, 더 작게 만들 수 있게 되는 것.
그래도 사람이 하는 부분
AI는 장면을 만들지만, 어떤 장면을 만들지는 정하지 못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정할 수는 있지만 그 결과가 평범합니다. 50편을 쓰면서 우리가 끝까지 사람 손에 남겨 둔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 어떤 하루를 고를지. 특별한 날이 아니라 사소한 날을 고르는 감각. 프러포즈보다 느슨해진 단추 하나가 더 오래 남습니다.
- 무엇을 말하지 않을지. 각본에서 가장 오래 걸리는 일은 쓰는 게 아니라 지우는 일이었습니다. 설명하고 싶은 충동을 참는 것.
- 컷을 어디서 끊을지. 12초는 짧습니다. 0.5초만 길어도 늘어지고, 0.5초만 짧아도 감정이 안 남습니다. 이건 아직 사람이 눈으로 보고 맞춰야 합니다.
그래서, 팔리나요
정직하게 말하면 이런 콘텐츠는 "지금 당장 사세요"를 하지 않습니다. 전환을 바로 끌어내는 건 다른 종류의 광고가 더 잘합니다.
대신 이 방식이 만드는 건 따로 있습니다. 브랜드 이름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장면이 생기는 것. 검색해서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그 브랜드를 이미 좋아하는 상태로 사이트에 도착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 그래서 우리는 숏폼 시리즈와 브랜드 사이트를 따로 만들지 않고 하나의 이야기로 잇습니다. 하츠의 영상을 보고 들어온 사람이 hazz.kr에서 같은 문장과 같은 온도를 만나도록.
좋은 홍보 콘텐츠는 제품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브랜드를 아는 사람을 만듭니다.
50편을 쓰고 나서 가장 확실해진 문장입니다. 다음 50편에서는 또 다른 걸 배우게 되겠죠. 그때 다시 적겠습니다.